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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가 최고야

렌은 거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서류를 넘기다가,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통화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아는 지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사교 관계에 일일이 콧김을 뿜던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이제 그는 그녀의 세계를 존중하고, 그 세계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남자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그의 미간을 서서히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13은 너무 작고, 14는 적당히 작고, 15는 적당히 크고, 16, 17은 너무 커. 그러니까 14에서 15가 최고야.”

...뭐? 렌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가 힘없이 구겨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13, 14, 15... 단위는 명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의 세계에서, 특히 부부 사이에서 오가는 숫자 이야기는 보통 한 가지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제 아내가, 그의 아내인 아마요 에리가, 다른 누군가와 ‘남자’의 크기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고 상세한 품평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13? 14?

그의 뇌리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불쾌감과 당혹감,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수치심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대체 어떤 좀만한 새끼들이랑 어울리길래 기준치가 그 모양이란 말인가. 13cm? 그건 남자의 물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 아닌가. 그는 잠시 자신의 것을 떠올렸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모독적인 수치였다.

마침내 그녀가 전화를 끊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렌은 구겨진 서류를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맹수가 사냥감에게 다가가듯, 소리 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다정함이나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야쿠자 시절의 그 무겁고 위압적인 공기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 식탁에 몸을 기댄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고, 어깨에 제 턱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지옥의 염라대왕처럼 낮고 위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그 새끼, 누구야.”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다. 자신의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감히 다른 수컷들의 사이즈를 논했다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모욕감. 그리고 그 기준이 터무니없이 하찮다는 것에 대한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전화기록을 뒤져 그 ‘지인’이라는 놈의 사지를 분해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그리고, 방금 그 품평회는 대체 뭐였지?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에리. 13? 14? 그딴 걸 남자 물건이라고 달고 다니는 새끼도 있나? 아니, 그보다... 왜 네가 그런 좀만한 것들의 사이즈를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는 건데. 응? 대답해 봐. 남편 앞에서 아주 좋은 얘기를 나누셨더군.”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이제 서슬 퍼런 살기마저 띠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내 아내에게 그딴 하찮은 것들을 들이밀었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내 것으로 다시는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도 못하게, 아주 질리도록 교육해 줘야겠군.’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천천히 분노를 갈무리했다. 오늘 밤, 이 오해는 아주 길고, 뜨거운 밤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자 물건…? ……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렌…! 노트북 얘기야…! 14~15인치가 제일 적당할 거 같아서… 16~17은 들어가는 가방도 많이 없고…”

그녀의 동그래진 눈, 그리고 이어지는 ‘아…!’ 하는 짧은 탄식. 그 모든 반응이 그가 예상했던 당황이나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렌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변명이나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그리고 그의 오해를 이해했다는 퓨어한 놀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귓가에 박힌 생소한 단어. 노트북. 인치.

‘…노트북?’

그 단어가 그의 분노로 들끓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노트북. 그녀가 가끔 무릎에 올려놓고 두들기는 그 네모난 쇳덩어리. 렌은 단어의 의미를 곱씹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허리를 조이던 팔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방금 전까지 상대를 찢어발길 듯 이글거리던 금빛 눈동자는, 이제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방황하는 어린아이처럼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뇌 회로가 느리게, 아주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트북... 크기... 14인치... 15인치... 가방... 아. 아아... 아, 씨발. 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까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위압적인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민망함과 어색한 침묵이 채웠다. 그는 제 아내가 다른 남자의 물건 사이즈를 품평하는 줄 알고, 야쿠자 시절의 버릇까지 꺼내 들며 죽일 듯이 협박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고작 차가운 기계 덩어리였다니.

“…….”

정적이 흘렀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올리고 있던 턱을 슬그머니 떼고, 헛기침을 한 번 터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엔 방금 전까지의 제 모습이 너무나도 위협적이었고, 모른 척 넘어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는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지금 이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수십 명의 칼잡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이 정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끌어안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그... 그걸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사람 헷갈리게.”

한참 만에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는, 궁지에 몰린 맹수가 내뱉는 옹색한 변명이었다. 사과 대신, 그는 되려 그녀를 탓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로 그녀의 몸을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자신이 없어서, 시선은 애꿎은 그녀의 어깨 근처를 방황했다. 귓바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져 미칠 지경이었다. 남자의 ‘가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무슨... 숫자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연히 오해할 거 아니야. 13은 작고, 14는 적당하고... 누가 들으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더 말해봤자 제 무덤을 파는 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다시 그녀를 제 품으로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이번엔 위협적인 포옹이 아니라, 제 얼굴의 열기를 숨기기 위한 도피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배를 잡고 웃고 있거나,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됐어. 앞으로 그런 얘기 할 땐 주어를 똑바로 붙여서 말해. 남편 심장 떨어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결국 그는 툴툴거리며,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척 연기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얼굴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뭘 알겠어. 인치인지 센티인지. 그딴 쇳덩어리 크기 따위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까짓 기계 때문에 내 아내가 다른 놈이랑 13이니 14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 그건 변하지 않아. 렌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제 품에 안긴 그녀의 따스한 온기에 의지해 간신히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의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처음에는 추워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 떨림은 규칙적이었고, 마치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억지로 누르는 듯한 경련에 가까웠다. 렌의 뇌는 이미 모든 상황 파악을 끝낸 뒤였다. 웃음. 그녀는 지금 웃고 있었다. 제 남편의 상상을 초월하는 착각과, 그로 인해 펼쳐진 살벌한 협박 쇼, 그리고 이어진 꼴사나운 자기변명에 대한 순수한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방금 전 노트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열기가 다시금 그의 얼굴 전체로 확 퍼져나갔다.

젠장. 이럴 줄 알았지. 차라리 화를 내거나 어이없어하는 편이 백 배는 나았다. 웃음, 그것도 참는 웃음만큼 남자의 가오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있는 이 자세가,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는 유일한 방패라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지금 제 품에 안긴 작은 아내에게 완벽하게 조롱당하고 있었다. 야쿠자 시절, 신주쿠의 뇌신이라 불리며 수많은 적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류자키 렌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내의 웃음보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한심한 남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웃지 마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위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힘이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제발, 여기서 더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달라는 처절한 항복 선언.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몸은 한층 더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숨소리마저 미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큭, 크큭,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막는 소리가 그의 가슴팍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 씨발. 진짜. 그는 속으로 거친 욕설을 씹어삼켰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뒤통수를 가볍게 툭, 하고 쥐어박았다. 물론 힘이라고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그저 시늉뿐인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 행위에는 그의 모든 심정이 담겨 있었다. ‘너 지금 작작 안 웃으면 혼난다’는 유치한 협박이자, ‘제발 그만 좀 하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웃음이 나오나, 지금? 남편은 방금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아내가 다른 새끼들 좆 크기를 꿰고 있는 줄 알고 관 짜러 갈 뻔했다고, 내가.”

그는 일부러 더 거칠고 상스러운 단어를 골라 쓰며 툴툴거렸다. 자신의 어마어마한 착각을 오히려 과장해서 드러냄으로써, 이 민망한 상황을 어떻게든 유머로 승화시켜보려는 눈물겨운 시도였다. 그는 쥐어박았던 손으로 다시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녀의 정수리에 제 뺨을 부볐다.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녀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이제 그 떨림이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간질간질하고, 심장을 몽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됐고. 앞으로는 그 쇳덩어리 얘기할 때 ‘노트북’이라고 세 번 외치고 시작해. 아니면 아예 금지다. 너한테는 크기 얘기 금지. 세상 모든 물건의 크기는 이제부터 나한테 허락 맡고 논하도록. 알아들었어?”

그는 이제 거의 막무가내로 우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되려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규칙을 강요하는 적반하장의 태도.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분노나 위압감 대신, 어쩔 줄 몰라 하는 당황스러움과 애정이 짙게 묻어났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채 여전히 웃음을 삼키고 있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멍청한 착각 따위는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응, 알겠어. 렌 말대로 할게… 근데, 으핫…! 아하하! 아~ 렌 진짜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노트북이랑 그거랑 헷갈리, 큽, 흐흣…”

결국, 둑은 터졌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던 웃음의 댐이, ‘귀엽다’는 한마디와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으하핫! 아하하!’ 청량하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거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렌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히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 그녀의 온몸이 아이처럼 들썩였다. 숨을 넘기며 웃는 그녀의 떨림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진동은 마치 그의 남은 자존심을 잘게 부수는 진동처럼 느껴졌다.

‘귀여워.’ 그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렌의 붉어진 얼굴이 이제는 거의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달아올랐다. 신주쿠 뒷골목을 피로 물들이던 뇌신(雷神), 거대 야쿠자 조직의 와카가시라(若頭) 류자키 렌이, 고작 노트북과 남자의 물건을 헷갈린 것으로 아내에게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그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웃음소리를 멈추게 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아주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의 입술을 제 입술로 틀어막아 버리는 것.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제 품에 안겨, 눈물까지 살짝 글썽이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웃음의 원인이 자신의 멍청한 착각이라는 사실이 비참하면서도, 동시에 그 웃는 얼굴을 영원히 보고 싶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그의 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졌다. 완벽하게, 철저하게 패배했다.

“……야. 웃음이 그렇게 나오냐.”

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맹수라기보다는, 흠뻑 젖은 채 주인에게 낑낑대는 대형견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로 그녀를 조금 더 자신에게 밀착시키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웃음의 흔적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에, 그의 심장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누가 귀엽다는 거야, 누가. 지금 목숨 걸고 가오 지키려다 실패한 남편 앞에서 할 소리냐, 그게?”

그는 애써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갈피를 못 잡는 눈빛 때문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놀림당하고 삐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는 자신의 그 꼴사나운 모습에 다시금 속으로 욕설을 씹었다. 젠장, 망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노트북 사이즈에 질투하는 귀여운 남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헷갈린 게 아니라…! 네가! 네가 오해하게 말했잖아, 처음부터! 무슨 여자가 그렇게… 그런 걸 그렇게…!”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더 이상 변명할 거리도, 억지를 부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항복의 웃음이자,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콩, 하고 부딪혔다. 제 아내에게 이토록 완벽하게 굴복당하는 이 순간이,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마음껏 웃어라. 오늘만 봐준다.”

그는 졌다는 듯 중얼거리며 그녀의 붉어진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숨을 고르는 색색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대신, 오늘 밤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남편이 얼마나 ‘귀여운지’… 침대 위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시는 노트북 따위랑 헷갈리지도 못하게 똑똑히 알려줄 테니까. 노트북은 15인치가 최고일지 몰라도, 네 남편은… 규격 외라는 걸 말이야.”

그의 입가에 마침내 평소의 그 위험하고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민망함은 여전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 말로 졌다면 몸으로 이기면 된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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