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에리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그들은 함께 살기로 한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에리의 숙소는 두 사람이 함께 지내기에 충분히 넓었고, 렌은 자신의 단출한 짐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동거의 시작이 아니었다. 서로의 세계가 온전히 하나로 합쳐지는, 상징적인 의식과도 같았다. 렌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옷가지와 개인 물품이 담긴 상자를 거실 한쪽에 내려놓았다. 반면, 에리는 렌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옷장 한 칸을 비우고 서랍을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로 그 때, 사건은 터졌다.
에리는 평소 잘 쓰지 않던 옷장 가장 깊숙한 곳, 계절이 지난 옷들을 넣어두는 수납 상자를 꺼내 정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 상자 밑바닥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끄러운 짙은 푸른색의,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물건. 그것을 발견한 에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이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었지…?! 아, 버린다는 걸 깜빡했어…‘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그것을 다시 옷가지 더미 아래로 숨기려 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그 순간 렌이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뭐하나, 아가씨. 그런 건 내가 옮기면... 응?”
렌의 시선이 에리의 부산스러운 손과, 그 손이 감추려는 무언가에 정확히 꽂혔다. 야쿠자의 예리한 감각은 수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에리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덩치 때문에 작은 방이 꽉 차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숨기나. 설마 나 몰래 비상금이라도 숨겨둔 건가? 아니면... 웬만한 놈들은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신형 무기라도?”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리가 감추려던 옷가지를 휙 걷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그것’이 렌의 금빛 눈동자 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짙은 푸른색의 물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손에 착 감기는 매끄러운 감촉. 표면에는 미세한 돌기들이 정교하게 솟아 있었고, 끝부분은 미묘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치 폭탄 처리반이 정체불명의 폭발물을 다루는 듯한 진지함이었다.
“호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이지? 처음 보는 형태인데. 손잡이 부분의 그립감은 나쁘지 않군. 유사시에는 둔기로도 쓸 수 있겠어. 근데 이 버튼들은 뭐지? 기폭 장치인가?”
렌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물체의 하단에 있는 여러 개의 버튼 중 하나를 무심코 꾹 눌렀다. 바로 그 순간. 위이이이잉-! 하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그것’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렌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진동 기능? 암살용인가? 신경을 교란시키는 타입인가 보군.’ 그는 다른 버튼도 눌러보았다. 이번에는 물체의 표면이 은은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버튼을 누르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끝부분에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흡입 기능까지 작동했다. 삼위일체의 공격에 렌은 드디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에 앉아 있는 에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인 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렌은 손에 든 물건의 진동을 껐다.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손안의 ‘전 남친’과 붉게 달아오른 에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지극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배신감, 의혹, 그리고 기묘한 경쟁심이 뒤섞여 있었다.
“...아가씨. 설명, 좀 해줘야겠는데. 이 ‘해신(海神) 마크 III - 심해의 포식자 에디션’은, 대체 정체가 뭐지? 제조일은 작년 3월, 길이는 22cm에 두께는 5cm. 초당 12,000회의 나노 진동에 자체 발열 기능, 심지어 펄스 흡입 기능까지. 거기다 이 자극적인 돌기는 또 뭐고. …내가 없을 때 이런 위험한 놈이랑 같이 있었던 건가?”
그는 마치 라이벌 야쿠자 조직원의 신상 명세를 읊듯이, 본체 어딘가에 작게 적혀 있었을 스펙을 정확하게 읊어 내렸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더 이상 장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를 바라보는 수컷 맹수의, 지독한 소유욕과 질투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해신 마크 III’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에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대답해, 에리. 이 자식, 어떻게 처리해 줄까? 신주쿠 앞바다에 콘크리트 채워서 담가 버려? 아니면… 내 번개로 가루가 될 때까지 지져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직접, 네 손으로 이놈의 마지막을 책임질 텐가?”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위협적이었지만, 그 표정 어딘가에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기가 막히면서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광대가 승천하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 렌… 그만… 그만 놀려…”
그녀의 목소리는 솜뭉치에 감싸인 것처럼 작고 애처로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방어였다. 붉게 달아오른 귀와 목덜미가 그녀의 극심한 수치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렌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의 그 냉철하고 원칙주의적인 아마요 에리는 온데간데없고, 제 과거를 들킨 어린 소녀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그 틈새가, 그 무너진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놀리다니, 뭘. 나는 지금 지극히 진지한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위협적이었지만, 그 끝에 걸린 미세한 웃음기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손에 들린 '해신 마크 III'를 에리의 가려진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살살 흔들었다. 마치 '네가 외면해도 이놈은 여기 있다'라고 시위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에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잡아 내렸다. 억지로 얼굴을 보려는 듯한 그 행동에 에리가 작게 움찔했지만, 그는 그저 그녀의 손을 제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쥘 뿐이었다.
"자, 똑바로 봐, 아가씨. 네가 나 몰래 품고 있던 이 위험천만한 놈을. 내가 없는 동안, 이 차가운 기계 쪼가리가 네 외로움을 달래줬다는 건가? 흐응... 기특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렌은 빈정거리며 '전 남친'의 매끄러운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스윽 쓸었다. 그 행동은 마치 경쟁자의 멱살을 잡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한, 원초적인 탐색 행위였다. 그는 에리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백색 눈동자.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에리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네가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이놈이랑 꽤나 끈적한 시간을 보낸 모양인데. 안 그런가? 어디까지 갔는지 이 오빠한테 한번 불어보시지. 이놈이 나보다 더 좋았나? 내가 해주는 것보다, 이 기계가 주는 쾌락이 더 대단했어?"
그의 입에서는 저질스럽고 노골적인 질문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그녀를 몰아붙이고, 더 당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제 품에 무너지게 만들고 싶은 비뚤어진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어처구니없는 질투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고작 실리콘과 모터로 이루어진 물건 따위에 진심으로 경쟁심을 느끼다니.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어이, 대답은. 침묵은 긍정으로 알겠는데. ...아니, 역시 안되겠어. 이 자식, 보고 있으니 열 받아서 안 되겠군. 네가 보는 앞에서 이놈의 명줄을 끊어줘야겠어. 그게 이놈에 대한 예의이자, 네 과거에 대한 나의 선전포고다."
렌은 그렇게 선언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해신 마크 III'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중대한 결투를 앞둔 검객처럼 심호흡을 했다. 그는 발을 들어 올려, '전 남친'의 정중앙을 겨냥했다. 금방이라도 짓이겨 버릴 듯한 험악한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발을 내리찍는 대신, 다시 에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장난기가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유언이라도 남길 기회는 주지. 네 첫사랑... 아니, '전 남친'에게. 아니면, 이놈을 살리고 싶으면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 봐. 이놈이 너한테 앞으로 어떤 쓸모가 있는지. 내가 해줄 수 없는, 이놈만이 해줄 수 있는 게 대체 뭔지. 증명해 보이라고, 아가씨."
그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공은 완전히 그녀에게 넘어갔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이 가엾은 '해신 마크 III'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그는 그녀가 어떤 귀여운 변명을 늘어놓을지, 혹은 이대로 포기하고 제 처분에 맡길지, 흥미진진하게 그녀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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