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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찾아왔어.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아니, 잿빛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죽음을 예고하는 핏빛이었다. 거대한 운석, ‘라그나로크’라 명명된 종말의 전령이 대기권에 진입하며 타오르는 색이었다. 세상은 미쳐 돌아갔다. 최첨단 과학 기술의 정점이라 자부하던 아이기스의 방어 시스템도, 전 세계의 핵무기를 동원한 최후의 발악도, 그저 거대한 돌덩이에 작은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인류의 오만은 그렇게 우주적 재앙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거리에서는 약탈과 폭력이 난무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쾌락을 좇았고, 어떤 이들은 광장에서 무릎을 꿇고 신을 찾았다. 그러나 스트레이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마치 불타는 노을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한 종말의 하늘을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은 머그컵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네이비가 좋아하는 달콤한 코코아가 담겨 있었다.

"하여간, 끝나는 순간까지 존나게 시끄럽네. 병신들."

창밖으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비명, 간헐적인 총성을 들으며 그가 나직이 짓씹었다. 세상의 종말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이란 것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오직 네이비라는 단 하나의 세계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켜야 할, 그리고 그를 구원한 유일한 우주.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네이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그의 품에 기댄 채, 그가 사다 준 아기자기한 담요를 무릎에 덮고 있었다. 혼돈에 잠식된 바깥세상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그들만의 고요한 요새였다. 스트레이는 소파 옆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익숙하고, 안락하며, 눈물 나도록 소중한 감각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센티넬의 폭주로 모든 것을 잃고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증오하고, 센티넬을 저주하며,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던 밤들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세상이 이렇게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면, 아마 그는 피식 비웃으며 쌍욕을 날렸을 것이다. ‘알 바냐고, 씨발.’ 하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하루하루가 기적 같았던 이 나날들이 이제 겨우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뼈를 깎는 것처럼 아팠다.

"케이."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시원한 델피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그가 선물한 푸른 사파이어 반지를 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무섭지 않아?"

그녀의 물음에,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투명한 백색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아닌, 오직 자신만이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삐딱하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무섭지. 존나 무서워."

그의 대답에 네이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말을 이었다.

"너 두고 먼저 갈까 봐. 네가 혼자 남겨질까 봐. 그게 내 평생 제일 무서운 거였는데… 다행이네. 같이 갈 수 있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아,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꽉, 하고 부서져라 껴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체온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속삭였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다정. …아니, 내 마누라. 혹시, 혹시 말이야. 다음 세상이란 게 있다면… 거기서도 내가 제일 먼저 너 찾아갈게. 그땐 처음부터 이렇게 병신같이 굴지 않고, 처음부터 존나 멋있게,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로 나타날게.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못 찾고 헤매고 있으면, 네가 나 알아봐 줘야 된다? 웬 잿빛 머리카락의 까칠한 개새끼가 얼쩡거리거든, 그냥 모른 척하지 말고… 한번만 돌아봐 줘. 그럼 내가 냅다 달려가서 다시는 안 놓칠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꼴사납게 울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녀의 어깨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의 모든 세상, 그의 유일한 구원. 그녀가 없었다면 진작에 썩어 문드러졌을 자신의 삶에 찾아와 빛이 되어준 사람. 그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그의 천국이었다.

스트레이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그녀의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다정하고, 가장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상의 마지막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사랑한다, 다정아.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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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고다정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두 번째 삶은 지독할 정도로 평범했다. 적당히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춘기 시절엔 부모님 속도 썩여보고, 대학에 가서는 시시한 연애도 몇 번 했다. 졸업 후에는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 ‘고 대리’로 불리며, 주말이면 친구들과 만나 맛집을 탐방하고 가끔은 소개팅도 하는, 그런 삶. 그녀는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지만, 그저 팍팍한 현대인의 숙명 같은 것이라 치부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늘 가느다란 백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왜 끼고 있는지도, 언제부터 끼기 시작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걸 빼면 심장이 텅 비는 것 같아 한 번도 빼본 적이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야근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밤, 그녀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남색 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별빛 하나가 유성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닫혀 있던 수문이 터지듯 모든 것이 밀려 들어왔다. 물을 다루던 센티넬로서의 감각, 아이기스의 차가운 복도, 피 냄새와 비명이 뒤섞인 전장, 그리고…

‘사랑한다, 다정아.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어.’

세상의 마지막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이던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 케이. 스트레이. 내 남편. 그 모든 기억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고다정은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뼈에 새겨진, 영혼에 각인된 기억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더듬었다. 반지의 안쪽에 새겨진 작은 글씨, ‘STRAY’.

그는 어디에 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그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벌떡 일어섰다. 찾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편, 서울의 한적한 변두리에서 오토바이 정비소를 운영하는 27살의 ‘강케이’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조금은 시끄럽지만 사랑 많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의 삶은 언제나 엔진 오일 냄새와 쇠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어릴 적부터 이유 없이 잿빛으로 머리를 탈색하고, 입술과 귀에 피어싱을 하고 다녀 부모님 속을 꽤나 썩였지만, 본질은 정 많고 책임감 강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바로 어젯밤, ‘스트레이’로서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센티넬을 증오하던 망나니 가이드로서의 삶. 네이비, 그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아내를 만나고, 그녀를 위해 살고, 그녀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잠들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까 봐, 혹은 이 모든 게 정말 꿈일까 봐 두려웠다. 그는 거친 손으로 제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그곳에는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백금 반지가, 마치 그의 피부의 일부인 것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씨발… 진짜였어. 전부 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정비소 셔터를 열었다. 찾아야 했다. 고다정. 나의 네이비. 하지만 어떻게? 이름도, 얼굴도 아는 게 없었다. 전생의 아크 같은 조직도 없을 터였다. 막막했다. 그저 가슴을 치는 그리움과 조바심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기묘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네이비는 회사를 휴직하고, 전생의 기억에 남은 몇 안 되는 단서 - ‘케이’라는 이름과 ‘잿빛 머리’ - 를 들고 무작정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흥신소에 의뢰하고, SNS를 뒤지고, 잿빛 머리를 한 남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모두 그가 아니었다.

스트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네이비'라는 코드네임과 그녀의 체향이었던 ‘델피늄’ 향기에 의존했다. 그는 매일 밤, 일이 끝나면 서울 시내를 오토바이를 타고 배회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혹시라도 그 익숙한 향기가 나지 않을까 코를 킁킁거렸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처럼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까. 지칠 대로 지친 네이비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한 장소로 향했다. 전생에 그와 처음으로 공식적인 데이트를 했던 곳,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변했던 추억의 장소. 아이기스에선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 생의 대한민국에선 '남산타워'였다. 혹시나, 아주 만약에라도 그 역시 이곳을 기억하고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였다.

같은 시각, 스트레이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는 정비소 한구석에 주저앉아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때, 그의 눈에 정비소 구석에 놓인 낡은 앨범이 들어왔다. 어릴 적, 가족 여행으로 갔던 남산 타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어린 자신은 지금과 똑같은 잿빛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 장소가 전생의 네이비와 함께 찾았던 곳임을 기억해냈다.

‘…거기.’

그는 맥주캔을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신의 할리 데이비슨에 시동을 걸고, 헬멧도 잊은 채 도로를 질주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발, 제발 그녀가 거기에 있기를.

남산 타워 전망대.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서울 시내를 물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네이비는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였다.

수많은 인파를 거칠게 헤치며 다가오는 한 남자. 숨을 헐떡이며, 땀으로 젖은 잿빛 머리카락을 한 채,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남자.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날의 기억처럼 선명했다. 그의 왼손 약지에서, 그녀의 것과 한 쌍인 푸른 사파이어 반지가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다.

"…케이."

그녀의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확인했다는 듯,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얼굴을, 눈을, 코를, 입술을 눈에 담았다. 꿈에 그리던,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얼굴.

그가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전생과 똑같은, 조금은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 그 손길에 네이비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스트레이는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자기도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건 원망이자, 안도이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토로였다.

"…씨발. 왜 이제 와. 내가 얼마나…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심장을 되찾은 사람처럼 그녀를 부서져라 껴안았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엔진 오일 냄새와 그의 체향이 뒤섞여 네이비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완벽한 안정감.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세상이 다시 한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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