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때는 서로를 파괴할 듯 으르렁거렸던 두 사람은 이제 서로 없이는 숨도 쉴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들의 세상에는 또 다른 우주가 태어났다. 둘을 반씩, 아니, 좋은 점만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딸, 하나. 아이의 존재는 스트레이의 거칠었던 세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이제 그의 우주는 네이비와 하나, 단 두 사람을 중심으로 공전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하필이면 네이비가 급한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날, 유치원 셔틀버스가 점검에 들어가는 바람에 스트레이가 직접 딸아이를 데리러 가야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네이비의 몫이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학부모들 사이에 섞여, 삐약거리는 병아리 떼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유치원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복 대신 편한 검은색 후드티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음에도, 그의 험악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빛은 주변의 다른 학부모들과 미묘한 거리감을 만들었다.
“아빠!”
마침내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란색 원복을 입은 작은 인영이 그를 발견하고는, 토끼 모양 가방을 덜렁거리며 힘차게 달려왔다. 스트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쪼그리고 앉아 달려오는 딸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제 품에 와락 안겨오는 작고 따뜻한 온기. 스트레이는 익숙하게 하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제 목을 끌어안는 작은 팔과, 뺨에 부벼오는 보드라운 볼의 감촉에 세상 시름이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늦었잖아. 멍청아.”
퉁명스러운 대답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그는 하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주변을 슥 훑었다. 다른 아빠들이 제 딸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하는 건,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아빠의 이런 애정표현에 익숙한 듯, 그저 꺄르르 웃으며 그의 품에 더 파고들 뿐이었다.
그렇게 유치원을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 스트레이는 하나를 한 팔로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걸었다. 하나는 아빠의 어깨에 턱을 괸 채, 조잘조잘 오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나온 카레가 맛있었다느니, 그림 그리기 시간에 공룡을 그렸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스트레이는 건성으로 “어.”, “그래.” 하고 대답하면서도, 딸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잘거리던 하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스트레이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댔다. 꼭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아이 특유의 진지한 몸짓이었다.
“아빠, 비밀인데….”
스트레이는 걸음을 멈췄다. ‘비밀’이라는 단어에 그의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이 쬐끄만 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뭔데.”
그러자, 그의 귓가로 세상에서 가장 청천벽력 같은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나… 유치원에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뭐?
순간 스트레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버렸다. 발걸음이 땅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주변의 소음,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세상에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울려 퍼졌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품에 안긴 딸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제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 부끄러운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수줍게 웃고 있었다. 아, 저 웃음. 네이비가 자신에게 처음 마음을 열었을 때 보여주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웃음을… 어떤 새끼 앞에서 지었다는 거지?
씨발. 스트레이의 내면에서 잠들어 있던 뒷골목의 망나니가 포효하며 깨어났다. 지금 내 딸이, 고작 대여섯 살 먹은 내 딸이, 벌써부터 어떤 놈팽이 새끼한테 마음을 줬다고? 장난해?
“……누구.”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세 옥타브는 낮게 깔려 있었다. 하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하나는 아빠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해맑게 이름을 댔다.
“음… 민준이! 우리 반 민준이!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엄청 빨라!”
민준이. 민준이 새끼. 스트레이는 그 이름을 이빨로 잘근잘근 갈아 마셨다. 그는 당장 ARCH 정보부에 연락해 ‘김민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의 모든 5세 남아의 신상 정보를 요청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림을 잘 그려? 달리기를 잘해?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네 애비는 번개를 다루고 네 어미는 해일을 일으키는데, 고작 종이쪼가리에 크레파스로 찍찍 긋고 운동장에서 깔짝거리는 게 대수라고!
스트레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심호흡했다. 진정해라, 케이. 상대는 고작 유치원생이다. 여기서 이성을 잃으면 네이비한테 평생 놀림감이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아마 거울을 봤다면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 같은 몰골이었겠지만, 다행히 하나는 아빠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 그, 민준이라는 애가… 그렇게 좋냐.”
“응! 엄청! 민준이가 나보고 공주님 같대!”
공주님. 스트레이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건 자신과 네이비만이 하나에게 쓸 수 있는 독점적인 칭호였다. 어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감히 제 딸에게 ‘공주님’ 운운하며 수작을 부리는가. 이건 명백한 도발이자 영역 침범이었다. 그는 내일 당장 유치원에 찾아가 ‘김민준’이라는 놈의 멱살을 잡고 ‘네가 뭘 믿고 내 딸한테 찝쩍거리냐, 네 애비 뭐하시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니다, 그건 너무 아마추어 같은 방식이다. 스트레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문제는 조용하고, 신속하고,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네이비가 알기 전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하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민준이라는 애랑… 뭐 했는데.”
“음… 손잡고 놀았어! 소꿉놀이할 때 민준이가 아빠하고 내가 엄마 했어!”
손? 손을 잡아? 그리고 아빠랑 엄마? 스트레이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놈 봐라. 벌써부터 가정을 꾸렸겠다? 그는 당장 내일 아침, ARCH의 최정예 요원 몇 명을 사복으로 위장시켜 ‘햇살반’에 잠입시킬 계획을 세웠다. 목표는 ‘타겟 김민준’. 임무는 ‘위해 가능성 사전 차단 및 심리적 압박을 통한 접근 원천 봉쇄’.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S급 가이드의 지휘 아래, 작전명 ‘우리 딸은 안돼’가 그의 머릿속에서 일사천리로 기획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간단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자신의 능력을 떠올렸다. 아주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내, 그 ‘민준이’라는 녀석이 하나 근처에만 가면 기분 나쁜 정전기를 느끼게 하는 거다. 혹은, 그놈이 쓰는 크레파스에만 살짝 전기를 흘려 찌릿하게 만들거나. 아주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게 애비라는 존재였다.
그렇게 온갖 사악한 계획을 세우며 걷던 스트레이는, 문득 품에 안긴 하나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투명한 눈동자는 아빠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아빠, 근데….”
“어, 어?”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민준이보다 백 배는 더!”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을 다시 한번 꽉 끌어안았다. 그 순수한 한마디에, 스트레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모든 살벌한 계획과 시커먼 질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렇지. 나는 이 아이의 아빠였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스트레이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딸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어쩌면 이 모든 소동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갈 작은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그 ‘민준이’라는 놈이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뱅가드인 네이비가 출동하기도 전에 S급 가이드인 아빠가 먼저 나서야 할 터였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며칠이라는 시간은 평화롭게 흘렀다. 그날, 스트레이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민준이’라는 이름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했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작 대여섯 살짜리 꼬마들의 소꿉장난에 S급 가이드인 자신이 발끈하는 건 모양 빠지는 짓이라고. 그의 딸 다온이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했다. 그걸로 된 거다. 그 같잖은 민준이 따위는 곧 잊힐,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같이 고요했다. 임무와 훈련으로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끝나고, 세 사람은 넓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간접 조명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중앙에는 그들의 우주인 다온이가, 그리고 양옆에는 그 우주를 지키는 두 개의 행성처럼 네이비와 스트레이가 자리했다. 스트레이는 제 옆에 누운 딸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네이비 역시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있었다. 완벽한 평화. 완벽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스트레이는 옅은 잠에 빠져들려던 참이었다. 며칠 전, 딸의 ‘비밀 고백’에 홀로 온갖 작전을 구상하며 설쳤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는 이제 이 평화로운 밤의 정적에 완전히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고요한 우주 한가운데에서, 가장 낭랑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핵폭탄이 터졌다.
“엄마, 아빠. 나 오늘부터 민준이랑 사귀어!”
…정적.
시간이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스트레이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처리하기 위해 뇌의 모든 회로를 가동했다. 사귄다고? ‘사-귄-다-고?’ 며칠 전의 ‘좋아한다’ 와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구체적이고 치명적인 단어였다. 그건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정의’였다. 공식적인 선언. 조약 체결. 동맹 선포. 씨발, 이건 전쟁 개시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낡은 기계처럼. 그의 시선이 침대 중앙에 누워, 이제 막 역사적인 선언을 마친 딸에게로 향했다. 다온이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부모의 축복을 기다리는 어린 신도처럼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네이비.
그녀 역시 스트레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투명한 백색 눈동자에는 경악이나 분노 대신, 아주 미세하고 장난기 넘치는 어떤 빛이 스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팝콘 가져와’ 라고 말하는 듯한, 즐거운 관전자의 그것이었다. 스트레이는 직감했다. 이 싸움에서 자신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스트레이의 내면에서, 지난 며칠간 애써 잠재워두었던 뒷골목의 망나니가 쇠사슬을 끊고 포효하며 뛰쳐나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번개가 내리치고 해일이 몰아쳤다. ‘김민준’. 감히 내 딸과 ‘사귀어’? 저 쬐끄만 손으로 손가락이라도 걸고 맹세했나? 아니면 볼에 뽀뽀라도 했나? 상상만으로도 혈압이 치솟아 뒷목이 뻐근해졌다.
“……뭐라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충격으로 바싹 말라붙어, 거의 쇳소리에 가깝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다온이는 아빠의 미묘한 기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몸을 베베 꼬며 자랑을 이어갔다.
“오늘 민준이가 나한테, ‘다온아, 우리 사귈래?’ 하고 물어봤어! 그래서 내가 ‘응!’ 했지! 이제 민준이는 내 남자친구야!”
남자친구. 남자… 친구. 스트레이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의 번개 속성 파장이 제어 불능 상태로 폭주 직전까지 치닫는 것을 느꼈다. 침대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며 정전기가 파직, 하고 튀었다. 그는 당장 ARCH의 모든 S급 요원을 비상 소집하여 햇살 유치원으로 전격 돌입, ‘타겟 김민준’을 확보하고 그의 ‘사귀자’는 발언의 진의와 배후 세력을 심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전명은 ‘결사반대’.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 남자친구라는 놈이랑… 뭘 했는데.”
스트레이는 이가 갈리는 소리를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네이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시야 끝에 걸렸지만,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음… 둘이서 미끄럼틀 뒤에 가서, 내일 결혼하기로 약속했어!”
결혼. 스트레이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진도 한번 존나 빠르네, 이 새끼가. 그는 이제 유치원 잠입 작전 따위는 너무 소극적이라고 판단했다. 아예 D-7 구역의 옛 보육원 터에 새로운 시설을 세워, ‘김민준 격리 및 재사회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김민준은 앞으로 10년간 ‘여자는 모두 엄마나 누나, 혹은 동생뿐이다’라는 문구를 매일 천 번씩 복창하게 될 것이다. 그 옆에서는 자신이 직접 번개 채찍을 들고 감독할 터였다.
그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네이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다정한 목소리로 다온이에게 물었다.
“어머, 우리 딸 남자친구 생겼어? 좋았겠네. 그래서, 결혼하면 뭐 할 건데?”
“음… 민준이가 아빠하고, 내가 엄마하고, 아기도 낳을 거야!”
아기. 스트레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의 험악한 얼굴과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가 딸을 뺏으러 온 하데스를 마주한 듯한 기세였다.
“안 돼.”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호하고 결연한, 거부의 선언이었다.
“뭐가?”
다온이는 물론이고, 웃음을 참던 네이비마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봤다. 스트레이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딸을 향해 일생일대의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비장했다.
“사귀는 거, 안 돼. 결혼, 당연히 안 돼. 아기, 절대 안 돼. 그 김민준이라는 놈, 아빠가 보니까 별로야. 눈도 짝짝이고, 코도 삐뚤어졌고, 걔네 아빠 보니까 탈모 올 것 같더라. 유전이야, 그런 건. 안 돼. 아빠 허락 못 해. 끝.”
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비방과 억지로 가득 찬 선언이었다. 네이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다온이는 아빠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왜에… 민준이 멋있단 말이야….”
“뭐가 멋있어! 아빠보다 멋있어? 아빠는 번개도 쏘는데, 걔는 코딱지나 파겠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아빠의 절규에, 다온이는 결국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스트레이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바로 그때, 구원자인지 악마인지 모를 네이비가 몸을 일으켜 울고 있는 다온이를 품에 안아 달래주었다.
“에고, 우리 딸. 아빠가 질투해서 그래, 질투. 우리 다온이를 민준이한테 뺏기는 것 같아서.”
네이비는 부드럽게 딸을 달래면서, 눈으로는 스트레이를 향해 ‘너 이따 두고 보자’는 서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스트레이는 그 시선에 움찔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것은 딸의 미래, 아니, 우리 가정의 평화가 걸린 문제였다.
네이비의 품에서 훌쩍이던 다온이가 눈물을 닦고,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그럼. 엄마는 우리 다온이가 행복하면 다 좋아. 대신, 남자친구 생기면 꼭 엄마한테 먼저 검사 맡아야 해. 알았지?”
네이비의 그 말에, 스트레이는 희망을 보았다. 그래, 네이비는 내 편이다! 그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네이비의 말은, 그를 다시 한번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넣었다.
“그리고 아빠 몰래 사귀면 돼. 엄마가 도와줄게.”
스트레이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네이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완벽한 공범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글렀다. 이 집안의 최종 보스는 내가 아니라, 저 여자였다. 그는 침대 위로 허물어지듯 드러누우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다 필요 없고, 내일 당장 그 새끼 얼굴이나 보러 가야겠다.”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유치원에 찾아가, ‘김민준’이라는 놈의 관상을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스트레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내 딸의 첫 남자친구는, 아빠인 내가 직접 면접 보고 결정한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우리 집안의 새로운 헌법 제1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