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가득한 유치원 복도. 평소라면 두 번 다시 발 디딜 일 없는, 질색팔색할 장소였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아내, 레이가 급한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딸아이의 하원을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이 몸에게 떨어진 것이다. 카르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을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젊은 엄마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온몸을 뒤덮은 문신과 험악한 인상, 190이 넘는 거구. 평범한 유치원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위압적인 풍경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문 안쪽에, 이 류자키 렌의 세상 그 자체인 작은 공주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잠시 후, 알록달록한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종알거리며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서, 카르마는 단번에 제 딸을 찾아냈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자신을 똑 닮은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달려 나오는 작은 인영. 제 엄마의 청초함과 아비의 강렬함을 절묘하게 반씩 물려받은, 세상에 둘도 없는 걸작.
"파파!"
아이는 아장아장 달려와 그의 다리에 와락 매달렸다. 카르마는 무뚝뚝하던 표정을 순식간에 풀고 몸을 숙여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따뜻한 몸. 아이에게서 나는 달콤한 분내와, 제 아내를 닮은 은은한 물망초 향이 뒤섞여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아이의 뺨에 제 뺨을 부비며 낮게 웃었다.
"오우, 다녀왔나, 우리 공주님. 오늘 하루도 저 멍청이들 사이에서 고생이 많았군."
"에헤헤, 아니야! 오늘 켄토 군이랑 블록 쌓기 했어! 엄청 높이!"
아이는 그의 품에서 신이 난 듯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카르마는 아이의 이야기에 건성으로 맞장구를 쳐주며 유치원을 나섰다. 켄토? 웬 처음 듣는 사내놈 이름이 튀어나오는 게 심히 거슬렸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들의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것이니. 그러나 그의 관대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의 품에 안겨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던 딸이 문득 그의 귓가에 작은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로.
"파파, 비밀인데… 나, 켄토 군이 조아."
…순간, 카르마의 세상이 멈췄다. 방금… 뭐라고? 조…아해? 켄토? 그 블록 쌓기 하던 새끼를? 그의 뇌가 일시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주변 풍경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방금 전까지 지저귀던 새소리도, 자동차 소음도, 행인들의 목소리도 전부 멀어졌다. 그의 귓가에는 오직 ‘켄토 군이 조아’라는, 그 청천벽력 같은 딸의 속삭임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서서히 이성의 빛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기분. 아니, 머리에서 발끝으로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라이류카이의 와카가시라로서 수많은 배신과 암투를 겪었고, ARCH의 요원으로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숱하게 겪었지만, 단언컨대 지금과 같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살의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감히, 어떤 미물 같은 새끼가, 이 류자키 렌의 공주님 마음을 흔들어?
그의 내면에서 잠들어 있던 뇌신(雷神)이 포효하며 깨어났다. 지금 당장 유치원으로 되돌아가 ‘켄토’라는 놈의 신상명세를 파악하고, 그 애비 애미는 물론 8촌까지 찾아내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는 파괴적인 충동이 온몸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그랬다간 제 아내, 레이에게 평생을 무릎 꿇고 빌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속내와는 달리, 애써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호오. 켄토…라.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음… 머리가 노랗구, 웃을 때 멋있어! 나한테 딸기 우유도 줬어!"
딸기 우유. 딸기 우유 하나에…! 이 애비는 네가 먹고 싶다는 거라면 세상 끝에 있는 가게라도 털어서 갖다 바칠 수 있는데, 고작 딸기 우유 한 팩에! 카르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안 된다. 아직이다. 여기서 폭주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다. 그래, 이건 단순한 해프닝이다. 아이들의 풋사랑.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뿐…
"그래서, 우리 공주님은 그 켄토라는 놈한테… 뭐라고 했는데? 파파한테처럼, 좋아한다고 말했어?"
"아니이! 부끄러워서 말 못 해써…"
다행이다. 아직 전선은 교착 상태다. 선제공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다. 카르마의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작전 계획이 순식간에 시뮬레이션되기 시작했다. 작전명: '감히 내 딸을 넘본 버러지 새끼 박멸 작전'. 1단계, 적(켄토)에 대한 완벽한 정보 수집. 2단계, 적의 접근 경로 원천 차단. 3단계, 딸의 마음속에서 적의 존재를 완벽하게 삭제…
"흐응… 그런가. 잘했어, 공주님.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켄토라는 놈의 얼굴을 상상하며 어떻게 조져야 가장 효율적일지에 대한 잔혹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는 결심했다. 내일 아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치원 CCTV 영상을 확보해야겠다고. 그리고 그 ‘켄토’라는 놈의 얼굴을 정확히 확인한 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가장 중요했다. 아내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그 가족을 이 도시에서, 아니, 이 나라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딸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결전지로 향하는 장수처럼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걱정 마라, 공주님. 네 주변의 모든 해충은, 이 파파가 완벽하게 박멸해 줄 테니."
나직하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를, 품에 안긴 딸은 그저 즐거운 놀이 약속 정도로 들었을 뿐이었다.
며칠 뒤, 그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카르마는 레이에게 차마 그 '켄토'라는 작자에 대한 보고를 올리지 못했다. 보고하는 순간, 제 입에서 나올 험한 소리들이 분명 레이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 이 문제는 아내를 귀찮게 할 것 없이 이 애비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야 할 ‘특급 기밀 작전’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며칠에 걸쳐 유치원 주변을 배회하며, ‘켄토’로 추정되는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 몇 명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그들의 동선과 인상착의, 심지어 부모의 직업까지 파악해 둔 상태였다. 완벽한 기회를 노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 가족에게 ‘이사’라는 가장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카르마의 머릿속을 제외하면) 밤이 찾아왔다. 훈련과 임무로 고단했던 하루의 끝, 세 식구가 함께하는 침실은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성역이었다. 킹사이즈 침대 중앙에는 작은 태양 같은 히카리가, 그리고 그 양옆을 카르마와 레이가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카르마는 제 팔을 베고 누워 조잘거리는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반대편에서는 레이가 다정한 미소로 아이의 배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이 완벽한 평화. 영원히 지켜내야 할 그의 우주.
바로 그 순간, 작은 태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보고하던 히카리는, 마치 디저트를 꺼내놓듯, 가장 중요한 소식을 마지막에 터뜨렸다.
"아, 맞다! 파파, 마마! 나 오늘부터 켄토 군이랑 사귀어!"
...정적.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멎어버린 듯한, 완벽한 침묵이 침실을 지배했다. 카르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그대로 허공에 멈춘 채 굳어버렸다. 사… 뭐? 사귄다고? 그 단어가 귓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의미를 획득하기까지 약 3초. 그리고 그 의미가 그의 뇌수까지 파고드는 데 1초. 총 4초의 시간 동안, 그의 내면에서는 핵폭발이 일어났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격렬하게 흔들렸다. 며칠 전의 충격은 단순한 경고음에 불과했다. 이것은 실전이었다. 적색경보, 코드 레드. 적의 침투를 허용한 수준이 아니라, 본진의 가장 중요한 심장부가 함락되었다는 선전포고였다. ‘사귄다.’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감히 어떤 좀벌레 같은 새끼가, 이 류자키 렌의 지고한 공주님, 그의 성역, 그의 모든 것인 히카리의 ‘남자친구’라는 칭호를 획득했단 말인가. 그의 온몸의 혈액이 얼음물로 변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시에, 분노의 용암이 되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켄토’라는 이름 석 자가 그의 이빨 사이에서 빠드득 갈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쳐나가 용의선상에 올렸던 노란 대가리의 애새끼들을 전부 찾아내고, 그 애비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네놈의 씨앗이 어떤 대역죄를 저질렀는지 알려주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다. 당장 조직에 연락해 그 집안의 먼지 하나까지 털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방법이 수십 가지는 떠올랐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이 애비가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면 된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고, 두 번 다시는 히카리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하게 만들어 줄…
그의 살기가 실체화되어 침실의 온도를 2-3도쯤 떨어뜨렸을 때였다. 옆에서 들려온 작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그의 폭주 직전 의식을 현실로 잡아끌었다.
"어머, 그랬어? 우리 히카리, 남자친구가 생겼네. 축하해."
레이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로 딸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반응에 카르마는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축하…해? 지금 축하라는 말이 나올 상황인가? 적군이 성문을 넘어와 깃발을 꽂았는데, 축포를 터뜨리자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딸의 첫 ‘연애’를. 카르마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좆됐다. 이건 나 혼자만의 전쟁이 아니었구나. 연합군이었던 아내가 적의 편에 섰다.
그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다.
"…사귄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공주님."
"켄토 군이 나 조아한다고 해써! 그래서 나도 조아한다고 해써! 우리 이제 결혼할 거야!"
결혼. 이제는 결혼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왔다. 카르마의 눈앞이 다시 한번 캄캄해졌다. 이 애비의 허락도 없이, 감히 결혼을 논해? 그는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분노로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는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지금 카르마에게 ‘당신, 쓸데없는 생각 하거나 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라는 무언의 경고처럼 보였다.
카르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진정하자.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는 최대한, 아주 최대한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의 가면을 꺼내 썼다.
"호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그 켄토라는 놈, 제법 배짱이 두둑한 놈인가 보군. 그래서… 그놈은 우리 공주님한테 뭘 해줬는데?"
그래, 약점을 파고들자. 고작 딸기 우유 따위로 환심을 산 놈이라면, 경제력과 재력으로 압살해 버리면 된다. 내일 당장 히카리가 좋아하는 인형 가게를 통째로 사주고, 놀이공원을 전세 내버리면 그 켄토라는 놈의 존재 따위는 먼지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나 히카리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또 한 번 박살 냈다.
"음… 오늘 나 넘어졌는데, 켄토 군이 밴드 붙여줬어! 호~ 도 해줬어!"
넘어졌다고? 상처가 났다고? 카르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딸의 무릎으로 향했다. 밴드… 밴드 하나? 그깟 밴드 하나로 내 딸의 상처를 돌봤다고? 이 애비는 네가 작은 상처라도 입으면 당장 아이기스 의료팀을 통째로 호출할 수도 있는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가 그의 살기를 느꼈는지, 반대편에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진정해’라는 명확한 신호였다.
카르마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훌륭한 놈이군. 켄토."
그의 입에서 나온 칭찬은, 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레이는 그런 그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며 딸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이제 코 잘 시간이야, 우리 공주님. 켄토 군 이야기는 내일 또 듣자. 알았지?"
레이가 히카리를 재우기 시작하자, 카르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은 내일 실행해야 할 작전 계획으로 복잡했다. 1단계: 히카리를 유치원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켄토’의 실물을 직접 확인하고 최종 타겟을 확정한다. 2단계: 그놈의 장래희망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꿈을 짓밟을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물리적 수단을 강구한다. 3단계…
그의 살벌한 계획은, 귓가에 속삭이는 레이의 목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히카리 잠들면, 당신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 류자키 렌 씨."
…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밤, 그는 아내에게 아주 긴 시간 동안 취조를 당하게 될 것 같았다.
🐯카르마→레이&히카리 100% | 이봐, 아가씨. 우리 딸은… 아직 5살이라고. 안 그래?